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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리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by Haileee 2020. 4. 10.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바이오센서를 만드는 과학도에서 이제는 소설을 쓰는 작가 김초엽.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상상의 세계를 특유의 분위기로 손에 잡힐 듯 그려내며, 정상과 비정상, 성공과 실패,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끊임없이 질문해온 그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관내분실》로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부문 대상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가작을 동시에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저자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신인소설가로서는 드물게 등단 일 년여 만에 《현대문학》, 《문학3》, 《에피》 등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한 작품으로 펴낸 첫 소설집으로, 근사한 세계를 그려내는 상상력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질문을 던지는 일곱 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SF(공상 과학)라는 장르가 내겐 항상 어렵고 낯설게 다가왔다. 오래 전 큰맘먹고 집어들었던 외국 SF소설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금방 하차했던 기억 때문인지 꽤 오랫동안 SF 장르를 멀리해왔다. 우리가 모르는 먼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보다는, 우리가 지금 현재 살아가는 오늘을 담아낸 소설을 더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베스트셀러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랬다. '독자의 구매력을 끌어모으려면 내용만큼 표지 디자인도 중요하구나.' 아련한 느낌의 수채화 같은 책의 표지가 눈에 띄어서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이 나뿐만이 아닐 거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 제목처럼 긴 제목 또한 눈길을 끌었다. 바로 휴대폰을 들어 책 제목을 검색해 정보를 찾아보았다. SF 소설이란다. SF는 어렵다는 편견 때문에 선뜻 결제하기가 망설여져 이 책을 처음 마주했던 날엔 결국 빈손으로 서점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왜인지 며칠 동안 저 긴 제목이 머릿속에 떠돌았다. 이건 읽어 봐야겠구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내 첫 SF 소설로 삼아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다시 서점을 찾았고, 결론적으로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이 책에 쓴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SF 하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차갑고 딱딱한, 감정 없는 로봇이었다. 내 상상력이 워낙 빈약한 탓도 있겠지만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었다. 겪어본 적 없는 미래를 다루는 만큼 생소하고 어려운 단어들 투성이일 것만 같고, 인간미라곤 없을 것만 같다는 견고한 편견...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이런 내 편협한 사고방식을 단번에 부숴 준 책이다. 가슴이 시려오다가 또 따뜻해지기도 하고, 가끔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처음 접하는 장르의 재미에 푹 빠져서, 수록된 작품들을 한 편 한 편 천천히 음미하면서도 이틀만에 완독할 수 있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표제작을 포함하여 7개의 작품이 수록된 단편 소설집이다. 작품마다 느낀 점을 최대한 스포일러 없이 간략하게 정리해보려고 한다.

 

먼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이 소설집의 첫 번째 작품이자 내 최애 작품이다. 어떠한 부조리도, 차별도,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한 마을이 있고 그 마을의 청년들은 성년식을 치르고 나면 '시초지'라는 곳으로 순례를 떠난다. 순례가 끝나면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청년들이 있는 한편 시초지에 남기로 결심하는 청년들이 있다. 왜 그곳에 남게 되는지, 시초지는 대체 어떤 곳인지 마을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화자는 성년식을 치르기 전부터 시초지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다. 왜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는 걸까. 그 호기심에서부터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작품에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운 마을과는 정반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에는 맞서 싸워야 할 혐오와 차별이 끝도 없이 펼쳐져있다. 하지만 그 고통을 함께 겪고 분투하고 이겨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사랑이란 성애적인 감정을 품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슬픔도 행복도 모두 공유하며 끝까지 함께 살아나가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52p)"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나갈 용기를 주고, 나를 지지해주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감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작품이었다.

 

 

<스펙트럼>에서는 사고로 우연히 외딴 행성에 당도한 '희진'이라는 인물이 그 행성을 살아가는 생명체를 발견한다. 그렇게 희진은 지구인 기준에서 볼 때 '외계인'인 생명체들과 수 십년 간 공존하며 살게 된다. 지구에 돌아온 희진은 자신이 외계인의 최초 발견자임을 밝히지만, 그들의 정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정신이 이상해진 것 아니냐는 말까지 듣게 될지언정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 희진이 왜 그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지, 그 이유가 작품 속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희진, 그리고 희진과 함께 살아간 외계인 '루이'의 이야기를 읽은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그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희진은 그들이 인간에게 발견 당하고, 인간에게 정복 당하기를 원치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지구인의 관찰 대상이 아닌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존재로서 외계인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외계인에 대한 우리의 유구한 호기심과는 별개로, 우리가 꼭 그들을 '발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공생 가설>을 읽으면 정말, 김초엽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낼까. 이런 이야기를 구상해내는 사람의 머릿속은 대체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아주 광활한 공간 속에 빛나는 상상력이 수놓여 있는 것 아닐까? 마치 우주처럼 말이다. <공생 가설>은 미지의 존재가 인간의 탄생 직후부터 영유아기까지 뇌내에서 공생하며,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도덕성과 윤리관을 습득하게 해준다는 가설이다. 한국의 과학자들이 아기의 생각을 읽어내는 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사는 이 존재는 영유아기가 지나면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그대로 인간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간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한국이어서 그런지, 비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묘한 현실성이 부여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나도 일곱 살 무렵까지는 외계에서 온 존재와 공생한 적이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든다. 먼 옛날을 추억하며 괜히 아련한 감정에 잠길 때마다 이 작품이 떠오르게 될 것 같다.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제목에도 나타나 있듯이, 빛의 속도로도 닿을 수 없는 행성에 사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노인 '안나'의 이야기이다. 아무도 오지 않는, 철거 직전의 우주 정거장에서 안나는 목적지인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가는 우주선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지구와 타 행성을 연결하는 혁명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우주의 모든 행성을 오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는 당연하다. 하지만 원래는 갈 수 있었던 행성마저 갈 수 없게 된다는 발상이 새로웠다. 기술의 발전과 남겨진 사람. 오늘날에도 비주류 집단이 겪는 인간 소외 현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감정인 안나의 '그리움'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슬렌포니아 행성계에 닿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몇 번이고 냉동인간이 되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안나. 만약 내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같은 우주 아래 있는 가족을 다신 만날 수 없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쓸쓸해진다. 하지만 안나를 바라보며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안나만큼 능력있는 인물이라면 혼자서라도 충분히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작품을 읽는 내내 계속 가슴을 비집고 나오는 기분이었다.

 

 

<감정의 물성>은 유독 공감 가는 구절이 많은 작품이었다. '감정의 물성'은 수많은 감정을 조약돌이나 비누 등으로 물체화한 상품으로 SNS 등을 통해 큰 인기를 끈다. 화자인 '나'는 감정을 물체화해서 사고 판다는 개념 자체를 믿지 않지만, 긍정적인 감정 뿐만 아니라 우울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물성에도 수요가 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품는다. 화자의 애인인 '보현'은 우울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우울'의 감정의 물성을 구입하여 곁에 둔다. 그리고 화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217p)" 잠시만이라도 내 감정을 직접 손에 쥐고 주무를 수 있다면 그 형체 없는 감정에 휘둘려 괴로워할 때보다 편안해질 수 있을까. 단 음식, 술, 담배 등 잠시간 기분을 고양시켜주는 것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하지만 '우울', '슬픔'과 같은 감정 그 자체를 내 손 위에 올려놓고 만지고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만약 내가 살아있는 동안 '감정의 물성'과 같은 제품이 출시되고 유행한다면, 나는 저런 것들 다 상술이라고 욕하면서도 하나쯤은 사보지 않을까 싶다.

 

 

<관내분실>은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한다. 인간의 뇌세포 속 기억을 컴퓨터에 저장하는 '마인드 업로딩'이 가능해진 시대가 배경이 된다. 기억을 보관하는 도서관에서 죽은 엄마의 기억이 분실된 사실을 알고 찾아나서는 딸 '지민'의 이야기이다. 분실된 기억을 찾기 위해서는 엄마만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유품이 필요하다. 직접 손으로 만든 물건일수록, 즉 직접적이고 독자적인 연관성이 클수록 가능성이 높아진다.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가 아닌 '김은하' 자신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는 유품을 찾으며, 지민은 자신을 감정적으로 학대했던 엄마의 삶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엄마'란 주로 숭고한 희생을 상징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엄마가 된다고 해서 없던 모성애가 뿅 나타나고 희생 정신이 마구 샘솟는 것도 아닌데, 그런 엄마만이 칭송받고 가시화된다. 문학 작품이나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서 학대하는 아버지는 수도 없이 존재하지만 학대하는 어머니는 찾기 힘들다. 하지만 엄마라고 해서 무조건 모성애로 중무장하게 되는 건 아니다. 집착하고 가두고 학대하는 엄마도 있다. <관내분실>에서는 그런 엄마의 인생을 그렸다. 그런 엄마를 용서하지 못하고, 끝까지 미워하지만, 이해하게 되는 딸을 그렸다. 자식을 학대한 가해자이자 성차별적인 사회 구조의 피해자이기도 한 여성 '김은하'를 입체적으로 다루었다. <관내분실>처럼, 여성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작품이 앞으로도 많이 쓰여지길 바란다.

 

 

마지막 수록작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유일한 동양인 여성 우주비행사였던 '재경'과, 이모인 재경을 존경하여 자신도 우주비행사가 된 '가윤'의 이야기이다. 우주에 닿기도 전에 사고로 인해 캡슐이 폭발하여 죽은 줄만 알았던 재경에 대한 비밀이 밝혀진다. (큰 스포일러라서 어떤 비밀인지는 생략) '최초의 동양인 여성 우주비행사'라는 위치에서 차별과 숭배를 동시에 받으며 피로감을 느끼던 재경에게서 현대 사회의 유능한 여성이 겪는 고충을 엿볼 수 있었다. 우주로 향하는 터널을 통과하기에 적합한 '사이보그'가 되기 위한 고된 훈련을 겪어낸 후 재경이 선택한 결말은 작품 밖 독자들에게도 어떤 해방감을 선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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