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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리뷰] 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입니다 - 이진송

by Haileee 2020. 4. 10.

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입니다 - 이진송

여성을 위한 문화 콘텐츠 에세이

 

옛날 같으면 밥 짓고 빨래하고 시집갔을 나이라는 말을 오직 ‘딸’에게만 하는 저의는 무엇일까?
개천의 용은 왜 언제나 수컷이며, 어떻게 그 개천이 마르지 않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을까?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어도, ‘더’ 가느다란 다리를 ‘더’ 오므리고 앉으라는 퀘스트만 더 늘어나는 것이 아닐까?


‘여자니까~’ 로 시작하는 지겹고 뻔한 요구들.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고, 듣고 있으며, 수없이 미간을 찡그렸을 이야기다. 여자아이를 키우는 8할은 자신이 ‘부적절하다’라는 박탈감과 수치심이라고 한다. ‘여성’이라는 특질보다 ‘아이’로서의 자아가 더 앞서는 시절부터 그것은 활개를 친다. 예쁘지 않으면, 날씬하지 않으면, 착하지 않으면 등에서부터 십대를 거치면 이 굴레는 더욱 교묘하고 강력하게 여성을 옥죄어 온다. 화장하지 않으면, 피부가 곱지 않으면, 애교를 부리지 않으면, 성형을 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성형이 되지 않으면, 웃지 않으면, 섹시하면서도 청순하지 않으면,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처녀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춰주지 않으면, 남자친구가 없으면, 결혼하지 못하면. 그리고 결국 여기에 까지 이른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이러한 현대판 코르셋에 재기발랄하고 강렬한 한방을 던지는 속시원한 책이 나왔다. 바로 비연애칼럼리스트이자, 페미니즘 작가인 이진송의 에세이, 《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입니다》이다.


저자 이진송은 여성을 둘러싼 이 수많은 요구와 굴레를 그 자신이 어떻게 겪어왔으며,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하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하며 이야기를 건넨다. 물론 저자 특유의 맛깔 나는 위트와 현대적인 B급 유머까지 구사해서 말이다. 그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끌어오는 영화며 소설, 드라마, 음악의 예시들은 익숙한 문화 속에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치던 지점들을 아주 명료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미디어와 문화들이 어떻게 여성을 단단히 묶어 관념화하고 있는가, 그 소름 돋는 실상 역시 적나라하게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이 불합리한 현실과 역사를 영화와 드라마, 소설과 만화 속에서 찾아 꺼내 적나라하게 풍자하고 비판한다. 때로는 장난스럽게, 또 자신의 상처까지 아낌없이 뽑아내 우리에게 말한다. 여자를 향한 이 말도 안 되는 기준들에 함께 돌을 던지고, 같이 손을 잡고 휘적휘적 달아나자고.


또한 저자는 자신 역시 이 무수한 “~하면 안 된다”와 “해야 한다”라는 압박 속에 분열되다가 말았다가 순응하다가 저항하다가 끌려 다니다가 버티다가 여기에까지 왔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한마디로 저자의 자전적인 널뛰기 기록이자, 여성들에게 전하는 연대와 교감, 공감과 치유를 담아낸 따뜻하고 즐거운 이야기 글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4월 한 달간 전자책을 1인당 2권씩 무료 이용이 가능해졌다. 이 혜택을 누려보기 위해 대여한 책 중 한 권이 《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입니다》라는 에세이다. 이 에세이를 쓴 이진송 작가는 비연애의 자유를 주장하는 독립잡지 [계간홀로]를 창간 및 발간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연애칼럼니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나 또한 계간홀로라는 잡지를 통해 작가를 알게 되었다. 《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입니다》는 2018년 첫 발간되었을 때부터 트위터 등 SNS에서 많은 추천글을 접하기도 했다. 솔직히 에세이집을 구입해서 읽는 건 돈이 아깝다는 생각에, 대여해서 읽어야지 결심만 하다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러다 교보문고 전자책 목록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바로 대여하게 된 것이다. 한국 여성을 가두는 프레임에 대해 재미있게 풀어낸 이 책을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미뤄뒀을지도 모른다니.

 

《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입니다》는 위트있고 평이한 문체로 페미니즘 담론을 다양한 시각에서 다룬 에세이집이다. 80년대 후반 출생인 작가가 대한민국 여성으로 살며 겪어온 경험들에 깊이 공감하며 읽었다. 여성들이 겪는 수많은 억압과 차별을 읽기 쉽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다루고 있다. 책장은 빠르고 가볍게 넘어가지만 마음은 그만큼 가볍지 않았달까. 주변 여성 지인들 모두에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대중문화 콘텐츠의 사례를 들며 진행되는 구성 또한 흥미로웠다. 각 장마다 영화, 드라마, 예능, 케이팝 등 각기 다른 사례를 통해 "00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라고 외치며 여성들을 격려한다. 가장 공감이 되고 명문이 많았던 파트만 몇 개 꼽아서 리뷰를 하고자 한다.

 

 

<모성애가 없어도>

 

"모성과 어머니에 대한 명언이 모두 임신과 출산, 양육을 해본 적 없고 할 가능성도 없는 남자들이 남겼다는 사실은

모성 신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모성은 낭만화되고 절대화되며 타자화된다. 그리고 여성들은 당사자의 목소리와 경험과 서사가 빠진 채 만들어진

이상적인 모성애에 도달하고자 발버둥치고, 자신이 그 기준에 부합하거나 넘칠까 봐 두려워한다.

그러는 사이 또 어머니의 사랑이 눈물겹고 엄마가 불쌍하고 모성애는 숭고한 것이라 믿지만, 어머니 대신

설거지는 하지 않고 '맘충'이라는 혐오발언을 쓰는 사람들이 모성에 대한 콘텐츠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낸다."

 

"임신과 출산과 양육을 버거워하면 모성애가 부족한 자격 미달의 엄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착취하고 싶다는 고백일 뿐이다. 그렇게 모성애가 좋고 대단해보이면

일단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하는 여성을 배제하거나 멸시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자."

 

아직도 모성애는 모든 여성의 유전자에 새겨져 나오는 것이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파트를 읽도록 권유하고 싶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성애는 모든 여성의 본능이다'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는 여성에게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거나, 육아를 힘들어하는 여성을 입막음하려는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다.

 

 

<우아하지 않아도>

 

"혹시 우아한 아저씨를 본 적 있는지? 아니면 우아한 아빠, 우아한 왕자, 우아한 남자친구?

우아함은 성별화된 가치이다. 초연함과 인내가 필요한 우아는 아저씨나 남자들의 몫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발산하고 표현하고 행동하면 된다."

 

"우아한 아저씨를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 허를 찌른다. 사실 '우아한'이라는 수식어는 10~20대 여성에겐 잘 붙지 않아서인지, 이 형용사에 대해 깊이 고찰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 파트에서 다루는 '우아함'이라는 가치는 여성들이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들어온 '네가 참아라', '얌전히 있어라' 등의 요구와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다. 여성이 아니면 좀처럼 듣기 힘든 요구들. 이런 요구들에 순응하고 맞춰 살아간 끝에 사회가 원하는 '우아한 여자'가 완성되는 거겠지.

 

"선물을 주었는데 받지 않으면 그 선물은 준 사람의 것이 되니까, 욕이나 모욕을 들으면 받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이런 마음가짐은 우아함의 문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폭력은 선물처럼 건네는 것이 아니라 투척하는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씌운다. (중략)

소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견디고 '괜찮은 척'하는 것은 언제나 약자의 몫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에 와닿았던 대목이다. 작가는 이 파트에서 별안간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공격한 남학생 앞에서 끝까지 상처받지 않은 척, 고고한 척 인내하며, 그러니까 '우아하게' 맞섰던 경험을 회상한다. 이를 통해 부정적인 감정을 분출하지 못하고, 참고 넘어가는 쪽은 항상 정해져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 가정 폭력이나 성범죄 피해자의 회복을 돕는답시고, 어떤 일을 당했든간에 '본인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식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기만이다. 작가가 말한 대로, 우리 사회는 피해자가 어떻게 대처할 지보다 어떻게 가해가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할 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가해자의 범죄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은 물론이고.

 

 

<골드미스 혹은 알파걸이 아니어도>

 

"커리어우먼이 상징하는 능동적인 '현대 여성'이 되어야만 한다는 압박, 유능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예쁘고 날씬하고 잘 꾸미기까지' 해야 하는 까다로운 기준, 오직 그런 여성들만을 유의미한 메신저로 승인하고

골드미스가 아닌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비가시화하는 사회. (중략)

유리천장은 뛰어난 개인이 으랏차차 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리천장이 여전히 공고한 이유는 여성이 뛰어나지 않아서, 그 여성들이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직 뛰어난 인간만이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회가 심각하게 뒤틀려 있다는 증명일 뿐이다."

 

이 파트 통째로 명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감명 깊게 읽었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유능하면서 아름답기까지 한 여성 인물이 주목 받는 것을 보며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를 날카롭게 짚어 준다. 성공한 여성들의 특수한 사례만 가지고 이제 차별은 사라졌다, 유리천장은 부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내가 지금 배가 부르니 기아 문제는 해결됐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남자보다 뛰어난 '알파걸'이 아닌 그저 평범한 소시민이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경제적 독립을 가능케 하는 직업"을 가질 권리가 있다. 똑똑하고 외모까지 예쁜 여성의 '사이다 발언'이 무조건 나쁘다는 게 아니다. 기본적인 인권을 누리기 위해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비가시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딸이 아니어도>

"딸은 아빠를 어떻게 바보로 만들까? 아버지의 머리를 내리쳐 인지 능력을 마비시키는 경우가 아니라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매력과 애교로 아빠를 사로잡는다. 딸의 성격이나 성향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기대'된다. 이것은 딸이 짊어지는 감정 노동이자 대상화이다. 아들보다 속을 덜 썩일 것이고,

나중에 부모에게 잘할 것이라는 기대는 입양에서 압도적인 비율로 여아가 선호되는 현상으로도 나타난다.

딸바보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싫어하는 딸, 자신과 맞지 않는 딸, 뚱뚱하거나 예쁘지 않거나 무뚝뚝한 딸은 존재하지 않는다."

 

"딸은 여자로 태어났을 뿐 아빠를 딸바보로 만들 만큼 귀엽거나 예쁠 의무가 없다. 육아는 '돕는 것'이 아니라 분담하여

책임지는 것이다. 아이를 보호하고 잘 돌보는 것은 의무이고, 칭찬받거나 자랑할 일은 아니다. 엄마들이 그러하듯."

 

무뚝뚝하고 애교 없는 장녀로서 항상 죄책감을 등에 이고 지냈던 것 같다. 싹싹하고 애교 많은 딸들도 많은데, 난 왜 그러지 못할까. 원체 애교가 없는 성격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딸로서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다. 그런 나에게 이 파트는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유독 딸에게만 감정 노동을 맡겨둔 듯이 구는 사회 풍조가 잘못된 것이라고 이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애초에 여성은 남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태어나보니 여자였을 뿐인데 부여되는 의무가 왜 이리 많은 걸까.

 

 

앞서 제시한 4개의 장 이외에도 주옥 같은 명문이 많은 에세이였다. 특히 20대, 30대 여성이라면 공감 가는 부분이 아주 많으니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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