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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리뷰]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 김진아

by Haileee 2020. 4. 19.

자기 몫을 되찾고 싶은 여성들을 위한 야망 에세이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 김진아

우리에겐 ‘야망’과 ‘정치’가 필요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의 연대를 위하여

More Pie Less Bullshit
여성에게 더 많은 파이를!

“여자라고 더 착하거나 도덕적인 존재일까? 아니다. 혹시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건 여성이 사회적, 육체적 약자로서 권력에 더 잘 순응했기 때문이다. 여자도 얼마든지 부도덕해질 수 있다. 남자만큼 혹은 남자보다 잔인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은 평화주의가 아니며 도덕성 투쟁이 아니다. 남자들에게 빼앗긴 여자 몫의 파이를 되찾는 투쟁이다. 한마디로 밥그릇 싸움이다. 먼저 이것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내 기분 좋자고, 힐링하려고, 더 멋진 나로 꾸미려고, 더 나은 남자를 찾으려고 하는 게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사실. 자기계발이 아닌 정치의 영역이라는 사실. 페미니즘이 남성 중심 사회와 가부장제를 향한 생존 투쟁이자 해방운동이라는 기본적 합의가 이루어지면 여자들은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에서(33-34쪽)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며칠 전 리뷰를 썼던 <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입니다>가 나와 동세대인 여성 저자가 쓴 여성의 이야기였다면,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은 나보다 조금 윗세대인 여성의 분투기이다. 저자인 김진아 작가는 2020년 현재 여성의당의 40대 당대표이자, 프리랜서 카피라이터이며 '울프소셜클럽'이라는 카페를 운영 중이다. 중요한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한 비혼 여성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가부장제에서 권장하는 형태의 가족을 꾸리지 않고 '자기만의 방'에서 독신으로 살아가는 40대 여성의 이야기를 여태껏 거의 듣지 못하고 살았다. 요즘에는 능력 있는 여성 예능인의 활동이 많이 활발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인인 내 삶과 밀접한 조언이나 격려가 필요했다. 경제적 독립과 비혼주의를 추구하는 여성에게 롤모델로 삼을 만한 여성 인물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을 통해 자신만의 파이를 성공적으로 얻은 여성의 조언을 얻을 수 있다. 저자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스러움'과 거리가 먼 자신의 모습에서 오는 내적 갈등, 건강하지 못한 페미니즘을 지향했던 직장인 시절, 연애, 결혼과 이혼 등의 경험과 그에 따른 깨달음을 솔직하게 밝힌다. 그리고 자신만의 파이를 얻기 위해 여성 개인의 야망과, 여성들만의 네트워크 즉 연대를 강조한다.

 

사실 나는 요즘 여성이 가져야 하는 '야망'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여자로서 최고의 직업은 수입이 안정적인 공무원이나 교사라고 여겨지는 사회. 거기다 더 잘 버는 남자와 결혼까지 하면 금상첨화다. 이렇게 여성으로서 성공한 삶은 한정지어져 왔다. 성별에 관계 없이 기발한 컨텐츠나 자신만의 재능만으로 구독자를 모아 큰 수입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유튜브는 아주 최근에 생긴 경로이다. 20대 후반인 내가 어릴 때부터 배워온 '여자로서의 성공'은 판에 박혀 있었고, 필요 이상의 성공은 알게모르게 억제되었다. 자연스럽게 야망과는 거리가 먼 어른으로 자랐고, 그래서 지금도 꼭 야망이 있어야 하나? 크게 성공하지 않더라도, 소소하고 평범하게 먹고사는 비혼 여성이 될 수는 없는 걸까? 같은 생각이 자꾸만 발목을 잡는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저자 또한 전 국민적으로 유명한 연예인이 아닐 뿐, 아주 재능 있는 광고 카피라이터로서 경력을 쌓아왔다. 책을 읽다보면 정말 롤모델로 삼고 싶고, 저자처럼 성공한 여성이 되고 싶다는 의욕이 마구 치솟는다. 하지만 책을 덮고 얼마 안 돼서 난 다시 평범하고, 어떨 땐 게으르기까지 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만다. 역시 나는 안 된다, 라는 자기 혐오가 나를 덮치고 만다. 모든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면 여성들이 연대하여 그 길을 개척해야 한다. 그건 아는데... 그걸 꼭 내가 해야 하나? 난 평범하게 살면 안 되나? 김진아 작가가 들으면 까무라칠 법한 생각만 머릿속을 맴돈다.

 

좋은 책 한 권으로 삶을 빠르게 변화시키기엔 내가 무기력하고 효능감 없는 인생을 너무도 길게 축적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변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좋은 책들을 사서 읽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가 왜 이리 힘이 드는지.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을 다시 훑으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여성으로서의 야망을 1g이라도 적립해야지. 지금 김진아 작가의 성공한 인생도 우여곡절 없이 그냥 찾아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야망은 소년들의 몫. 소녀들은 야망을 키우고 드러내게끔 키워지지 않는다. 착하고 무해해야 한다.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배운다.

하지만 그건 가부장제가 잘 굴러가는 데 필요한 여성성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여성성'은 대개 그럴 확률이 높다."

 

"결혼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굴욕감을 카펫처럼 바닥에 깔고 간다. 부부 관계가 아무리 평등하다 해도 사회적 가장의 자리를 남자에게 넘겨주는

가부장제 자체가 이미 여성이 이등 시민임을 전제하는 제도다. 똑같이 나가 일을 하고 돈을 버는데도 고스란히 여자에게 쏠리는

가사 노동만큼이나 이 굴욕감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남자의 얼굴을 한 국가는 여자들이 닥치고 그들의 그림자가 되어 그림자 노동을 제공하길 바란다.

결혼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가장 쉽고 편한 방편이다. 이성애, 모성애, 가족애 등 각종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그럴듯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여자들을 가부장제 속에 몰아넣고 갈아 넣은 결과가 2018년 세계 최저 출산율이다.

1인당 GDP가 3만 3천 달러에 이르는 개발국가의 사상 최저 출산율이 말해주는 건 뭘까? 그 국가의 개발은 여성 착취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그 국가의 여성 인권은 전혀 개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섹스 앤 더 시티>의 더 큰 해악은 '꾸밈 중독beauty sick'보다 '남자 중독relationship sick'의 패션화다. "나는 나를 더 사랑해"라고 외치지만

그들의 삶은 남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공전한다. 어딜 가든 무얼 하든 친구들과의 대화 소재도 늘 남자다.

세상의 다른 요소들은 표백된 것처럼 모든 신경과 에너지와 감정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다.

야망과 재능이 무엇이건 간에 연애와 결혼이 여자의 가장 중요한 이슈라고 선동하는 프로파간다. 사실 <신데렐라>에서 <섹스 앤 더 시티>로

시대와 인물이 달라졌을 뿐 여자 주인공의 서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드라마의 힘은 생각보다 세다.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 50%가

미국 드라마 <X파일>의 주인공 스컬리 덕분에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공계에서 일하지 않는 여성 중에서도 63%가 스컬리 덕분에 과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스컬리 효과'라는 용어까지 나왔다.

지적이고 독립적이고 일에 몰두하는 여성 캐릭터 한 명의 힘이 이 정도다. 우리에겐 더 많은 스컬리가 필요하다.

여성 서사를 소비하는 것 자체로 의미 있지만 퇴행적이고 편향적인 여성 서사를 보이콧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나마 가진 소비자 권력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용한단 말인가?"

 

('퇴행적이고 편향적인 여성 서사를 보이콧'해야 한다는 의견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론 딜레마를 느낀다. 드라마나 영화, 케이팝 등에서의 여성 소비 방식은 대부분이 코르셋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부장제의 존속에 힘을 싣는 '무해한 음모'적 이성애(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성애 커플의 이야기 등)나 과도한 코르셋 전시 등 유해한 요소를 포함하는 콘텐츠를 보이콧하다보면 소비할 수 있는 여성 서사가 극소수인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 때문에 유해한 여성 서사 보이콧에 대해 '여성에게만 과하게 검열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나는 아직도 보이콧과 소비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너무 과하게 여성 혐오적이고 폭력적이지만 않다면, 여성이 주인공인 콘텐츠는 적극적으로 소비해 줘야 여성이 설 자리가 더 넓어질 것 같다. 어떤 분야에서든 여성이 앞에 설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성이 앞에 섰을 때, 그 방식이 같은 여성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 같다면? 나는 케이팝 아이돌 시장을 보며 특히 이런 고뇌에 자주 빠진다. 많은 여성 아이돌의 노래가 히트치고, 그만큼 그들이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그들이 전시하는 코르셋의 유해함을 무시하기 어렵다. 하지만 5년 전 쯤과 지금의 여성 아이돌 의상이나 안무를 비교하면 변화도 있다. 오랜만에 생각난, 예전에 좋아했던 걸그룹의 뮤비를 보고 그 선정성에 경악을 했다. 당시의 난 그저 예쁘다, 부럽다는 생각만 하며 뮤비를 즐겨봤던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은 많은 걸그룹이 수트를 입고 춤을 추고, 예전만큼 노골적으로 곡선을 강조하는 안무는 사라져 가고 있다. 하의가 편안한 핏의 긴 바지면 상하의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손바닥만 한 상의를 입히긴 한다. 아직도 갈비뼈가 다 보이도록 마른 멤버가 일반인 여성의 선망의 대상이 되긴 한다. 하지만 변화는 분명히 있다. 노출된 허리선이나 갈비뼈보다, 대상화 없는 의상과 당당함을 뽐내는 가사에 더 주목하고 환호해 준다면, 2025년엔 2020년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경악하게 될 만큼 변화가 이루어져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의 피부, 나의 꾸밈. 그것은 결코 나의 권력이 아니었다.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 외모는 중요한 승진에서 기혼남에게

밀렸을 때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날씬하고 보기 좋다고 일 하나 더 받지 않았다.

남자들은 술자리에서 옆자리는 내어줘도 돈이 되는 기회는 내어주지 않았다. 외모권력이라는 말은 그래서 모순된다.

권력은 초이스를 하는 쪽에 있지 초이스를 받는 쪽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의 외모 권력은 허상이며 타인에게 성적으로 욕망당하고 싶은

욕망 역시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이 내 안에 내면화된 남성의 시선, 남성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한 채 살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다른 욕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 '탈코르셋'은 그저 머리를 자르고 화장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깨닫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성적 대상화에 몰두했던 사람일수록 이 의미를 잘 이해한다."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남자들에게 욕망당하고 싶은 욕망은, 아직 완전히 소멸되진 않았지만 어릴 때보다 많이 사그라들었다. 오히려 지금 나를 갈등하게 만드는 점은 '외모 권력'이라는 허상의 권력이 남성의 시선을 제외하고도, 여성들 사이에서도 작동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모든 여성이 다른 여성을 외모만 보고 판단하고, 예쁜 외모를 가진 여자만 대접해준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아름다운 여성이 같은 여성의 선망의 대상이 되듯이, 사회가 요구하는 미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여성이 같은 여성에게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현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여자의 귓속에 무책임하게 때려박는 '예쁜 게 다야'라는 주문이 여성끼리의 연대를 가로막고 있다고 느껴질 때 나는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한 여성의 여성 혐오가 서로를 옥죄는 게 슬프다. 남자에게 어떻게 보이든 상관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여성들 중에도, 같은 여성 집단 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욕구는 쉽게 버리지 못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예전부터 남자보다 여자에게 에쁘다는 말을 들으면 더 기분이 좋다는 얘기는 많이들 해오지 않았는가. 이제는 여자가 여자에게 예쁘다는 말보다는 예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더 많이 해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러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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