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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리뷰] 폭력의 진부함 - 이라영

by Haileee 2021. 2. 24.

이라영 작가님의 글은 '정치적인 식탁'으로 처음 접했다. 공감 가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아서 처음으로 필사라는 걸 해본 책이기도 했다. 다른 글들도 읽어보겠다고 다짐만 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던 때에, 신간인 <폭력의 진부함>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다.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겪는, 너무 일상적이라 종종 여성마저도 그저 사적인 사건으로 덮어두는 폭력에 대해 직설적이고 비판적으로 논하는 책이었다.

 

구성은 크게 1, 2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먼저 1부에서는 작가 본인이 여성으로 살아가며 겪은 경험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복기한다.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놓은 것은 약 50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사회는 여성의 경험을 사적인 것으로 축소하려고 한다. 네가 더 조심하면 돼. 네가 운이 나빴네. 모든 남자들이 다 그렇지는 않아...와 같은 말들이 여성이 목소리 내는 것을 차단한다. 미투 운동을 통해 굳건한 장벽을 깨부수고 여성 간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오히려 '미투 당했다' 운운하며 조롱하는 일마저 흔히 발생하곤 한다.

 

같은 여성들의 지지 그 이상으로 비난 받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일단 그들이 이 책을 읽어야 비난을 하든 말든 하겠지만...), 자신의 경험을 복기하여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터넷 상에 익명으로 이러한 복기를 게시하라고 해도 망설여지는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도 겪었으며, 이는 절대 개인적인 일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성별 간의 위계에 의한 폭력임을 분명히 하고자 한 작가의 결단이 존경스럽다.

 

2부에서는 여성을 중심으로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의 정체성이 권력자, 지배자에 의해 어떻게 재단되는가에 대해 다각적인 방면에서 논한다. 90~2000년대 여성 연예인 동영상 유출 사건부터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 웹하드 카르텔에 이어 N번방까지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에 기인한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며, 굳건히 자리 잡은 성별 권력에 대해 지적한다. 여성의 인격과 주체성이 남성의 시선을 거치며 지워지는 양상을 친숙한 문학, 영화 등 예술 작품을 예로 들며 알기 쉽게 설명한다. '예술'이라는 이름 안에서 여성이 어떻게 대상화 당하고, 지워지는지에 대해 비판한다.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나 자습서에 실린 작품들을 접하며 '이런게 교과서에 실린다고?'라며 의아해 했던 것, 대중적으로 흥행한 영화를 보며 어쩐지 찜찜함을 느꼈던 것... 내겐 어떤 위화감, 불쾌감과 같은 '감정'으로만 머물던 것을 언어화하여 명확히 제시해주는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하며 읽었다. 특히 예술 장르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소설과 영화 등 다양한 장르 속 소수자 서사에 대해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폭력은 진부하게 반복되는데, 이에 대한 저항은 언제나 진부하지 않다. '살아있는 사람'으로 공적 발화를 하기 위해 애쓰는 많은 사람들을 지지하며, 나의 크지 않은 목소리 하나를 얹는다.' 여성의 경험을 사사로운 일로 축소하지 않고 정치화하는 것. 여기서 미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미투에 대해 그 번역 방식, 그리고 용어의 사용 방식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 또한 나에게 사고의 확장을 가져다 주었다. 작가는 '나도 당했다'라는 번역에 대해 '피해자를 '당한 사람'으로 가두고 무력한 이미지로 전시'하며 '폭력에 대한 관음의 시선이 읽힌다'고 지적한다. 나도 각계각층의 여성들의 폭로를 지켜보며, 응원하고 연대하면서도 그들도 '당했다'는 표현을 문제 의식 없이 써왔던 것 같다. 이는 피해자가 어떻게 당했는가에 자연스럽게 초점을 두며 가해자의 존재를 지울 위험이 있는 표현 방식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미투'라는 간결한 용어가 피해 사실을 축소하고 운동이 가지는 의의와 맥락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의견에도 동의한다. 이는 언론에서 미투 운동의 유래와는 전혀 관계 없는 사건에조차도 '미투'라는 단어를 남용하는 현실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다시 펼쳐 훑으면서 또 한 번 작가의 통찰력과, 어렵지 않은 문장에 핵심을 담아내는 필력에 감탄했다. 나는 '읽는페미'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이 책이 출간된 것을 알고 구매하게 되었는데, 아마 나와 같은 경로로 이 책을 접한 사람들이 꽤 많을 거라 생각한다. 좋은 책을 써준 이라영 작가님에게도, 책을 소개해준 읽는페미 계정주님에게도 감사하다.

 

 

"평소에는 사람의 범위가 협소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갑자기 차별받던 약자들이 '모든 사람'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린다. 약자와 소수자는 위험 앞에서만 보편적 사람이 된다. 그들이 겪는 예외적 상황을 보이지 않게 만들기 위해 '보편적' 인권을 끌어온다. 그것이 차별이다. '모든 생명의 문제', 이런 표현은 사회에서 약자와 소수자가 처한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를 '정의롭게' 제압하는 방식이다." 117p

 

"성착취물을 즐겨온 그들은 그 동영상 속의 여성도 모니터 밖에서 걸어 다니는, 피가 있고 살이 있으며 숨 쉬는 인간임을 알지만 부정한다. 그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권력을 얻는다. 자신의 시선 권력과 폭력적 쾌감을 추구하기 위해 여성의 삶은 적당히 모른 척한다." 142~143p

 

"'직원 폭행 동영상'은 폭력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지만 성착취물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지 않는다. 이 두 종류의 영상을 대하는 다른 태도가 바로 이 사회에 감춰진 오래된 폭력이다. '야동'이라는 작명에서 알 수 있듯 이 불법촬영 동영상은 오락물이기에 영상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어떤 고발도 전달받지 않는다. 오히려 영상 속의 여성이 울부짖고, 거부하고, 살려 달라고 사정할수록 남성 권력에 도취된다. 그렇기에 '야동'은 그 자체로 폭력의 결과이며 수단이다." 143p

 

"포르노그래피는 여성에게서 체면을 삭제하고 여성을 지배받는 살덩이로 만들어 돈을 버는 산업이고 폭력적 정치 행위다. 그렇기에 불법유출동영상을 찾는 그 행위가 바로 성폭력이다." 150p

 

"'나도 당할 수 있어'를 느끼는 사람과 '나까지 나쁜 놈으로 만들지 마'라는 감정을 우선 드러내는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다. '경험한 자'와 '해석하는 자'의 괴리감은 권력 차이에서 발생한다. '너도 당하고 싶어?'라고 으름장을 놓는 사람과 '나도 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은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다. '내 문제'가 아니라 '너도 당할 수 있다.'고 '남의 일'로 만드는 사람은 폭력적으로 문제를 해석한다." 194p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서사를 지을 기회를 쉽게 박탈당하는 이들은 돌발적인 상황을 만드는 폭로라는 형식을 취해야 겨우 이야기를 던질 수 있다." 20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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