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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리뷰] 성노동, 성매매가 아니라 성착취 - 박혜정

by Haileee 2021. 2. 17.

여성주의에 무지하고, 내가 보고 배워온 것들이 당연하다고만 여기며 살던 때에는 성착취에 대한 비판의식도 물론 없었다. 미디어를 통해 일상적으로 송출되는 '룸살롱'에서 노는 장면, 으슥한 길거리에 줄지어 있는 불건전한 분위기의 간판들(주로 여성의 이름으로 여겨지는 고유명사가 업소의 이름이었고, 이런 곳을 '방석집'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성인이 된 후에야 알았다)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을 뿐이다. 대한민국은 성매매가 불법인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업소들이 버젓이 운영되고, 티비에서는 왜 그런 장면을 자꾸 보여줄까. 성매매가 불법임을 알기 전에는 그냥 '남자가 여자를 끼고 노는' 건 성인 남녀 사이에서는 흔히 있는 일인 줄만 알았고 그 안에 얽힌 권력 관계를 읽어내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여러모로 우리나라는 성착취에 친화적이고, 성착취의 이면에 존재하는 여성들의 고통은 지운 채 그저 화려한 유흥인 것처럼 포장해서 내놓는다. 그렇게 돈을 지불하고 여자를 사는 행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우리 삶에 침투한다. 원래 남녀 관계란 그런 거라는 듯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재화 취급하여 사고 파는 행위가 얼마나 여성 혐오적인지 깨달은 지 얼마 안 되어, 새로운 난관이 봉착했다. 바로 '성노동'이라는 개념이었다. 여성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바탕으로, 폭력이 행해지지 않는 성매매는 합법적이다. 여느 사람들과 동일하게 '노동'을 하는 것이며, 그들이 파는 건 성적 서비스일 뿐이므로 여성과 남성을 피해자-가해자 구도로 두어서는 안되며 성판매자-성구매자라는 거래 관계에 놓여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를 착취라고 보는 것은 '성판매 여성'의 자발성과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언뜻 보기에는 참 그럴듯한 논리이다. 사태를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보고 합리화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구를 건드린다. 나 또한 여자가 스스로 나서는 건 문제가 없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결론 짓고 넘어가기엔 찜찜한 구석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왜 '자발적으로' 성을 팔기 위해 성매매 집결지로 향하는 사람은 남성보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가? 그들 말마따나 남성은 여성보다 성욕이 강해서 해소할 곳이 필요하다면 그 넘쳐나는 성욕을 직업으로 삼아 남성 스스로가 '성판매자'가 되면 되지 않나? 왜 거의 항상 구매하는 사람은 남성이고 판매하는 사람은 여성인가.

그리고 그것이 정말 성'노동'이라면 여타 노동처럼 경력이 쌓이고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으로 그 능력을 더 인정받게 되어야 하지 않나. 경력이 길어질수록 상품 가치가 떨어지고 외면 받는 것을 과연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정리되지 않는 의구심을 해결해주는 책이 <성노동, 성매매가 아니라 성착취>이다. 현장에서 발로 뛰며 성착취 여성 지원 활동을 한 작가의 경험을 통해 '성노동'이 얼마나 허울 좋은 거짓말인지 명쾌하게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성매매'라는 용어보다 '상업화된 성착취'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처음에는 생소하지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사태를 정확히 직시하기에 가장 적절한 용어임을 깨닫게 된다. 상업화된 성착취는 존재 자체로 남성 지배적이며 여성 혐오적이다. 애초에 여성의 존엄성과 인간성을 짓밟고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산업이다. 이를 전면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성매매'라는 용어도 부족하다. 아무리 돈을 지불했다 해도, 여성의 가장 사적인 영역을 지배하고 침해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성노동, 성매매가 아니라 성착취>는 상업화된 성착취가 성착취 피해자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에게 해로운 이유, 성착취 피해자 여성이 성착취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족쇄, 대한민국 성산업의 역사, 성노동론의 기본적인 입장과 그에 대한 비판, 성노동론과 퀴어 정치학의 결합 등의 내용이 길지 않은 분량에 알차게 담겨 있는 책이다.

 

착한 성착취, 좋은 성착취라는 말이 모순이듯 성착취 자체가 여성 혐오적이므로 성노동론은 성별에 따른 명백한 가해-피해 구도를 지우는 여성혐오적인 이론이다. 특히 여성 개인의 일탈적인 '섹스'로 축소시키는 그들의 논리를 보고서는 머릿속이 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성노동을 지지하는 단체는 포주의 지원을 받으며 운영되고 있으며, 그들이 지지하는 '성노동자'에는 성착취 피해 여성뿐만 아니라 포주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에는 배신감마저 들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성노동론인가. 상업화된 성착취의 합법화/비범죄화 주장은 결국 남성이 여성의 몸을 합법적으로 이용하고, 남성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수단으로 합법적으로 이득을 취하게 해주는 남성친화적 주장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돈만 있으면 자유롭게 사서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명제가 사회적 합의를 얻으려면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까. 책을 덮은 후 씁쓸한 심정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사회적으로 만연한 젠더 무감성을 개선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발로 뛰며 피해 여성들을 지원하고, 상업화된 성착취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 이런 책까지 집필한 작가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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