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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리뷰]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by Haileee 2021. 2. 28.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완독했다. 수상 작가 중 김초엽이 있어서 샀는데, 김초엽 이외에도 좋은 젊은 작가들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가장 좋았던 수상작은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였고 다음으로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였다.

<다른 세계에서도>를 읽으며 놀랐던 점은, 남성 작가가 임신중지에 대한 서사를 다양한 입장에 놓인 여성의 입장에 서서 풀어냈다는 점이었다. 계획되지 않은 임신과 이른 결혼을 '행복'으로 여기고 선택한 여성, 낙태죄 위헌이라는 성과를 위해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여성,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을 불행한 사건을 계기로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불쌍한' 여성으로 프레임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여성. 작가는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자극적인 갈등 상황을 굳이 삽입하지 않은 채 임신중지를 둘러싼 여러 여성의 삶을 그려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청자로 상정한 이야기의 전개 방식 또한 인상 깊었다. (작품 속 '당신'이 누군지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나는 '당신'이 임신한 여동생의 남편이라고 예측했다. 설마 싸고 튀는 건 아니겠지, 싸튀충에게 보내는 원망의 편지는 아니겠지 읽는 내내 걱정했는데 그렇게 극단으로 치닫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로 그렇다 할 진전이 없는 지지부진한 상황에 대해 지적하기도 한다. 작가는 무엇을 계기로 임신중지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을까가 궁금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남자가 이렇게 역지사지를 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렇게 거슬리는 부분이 거의 없는, 남성 작가의 여성 서사는 처음 경험해 본다. 등단작과 이 작품 이외에는 눈에 띄는 작품 활동이 없어서 개인적으로 아쉽다.

최은영의 소설들을 다 좋아하지는 않는다. 조금 지루한 작품도 있었고, 읽는 내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가정폭력의 피해자,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들, 성소수자 등 사회에서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는 작가임은 확실하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는 '젊은 여성 강사'라는 상대적으로 차별 받는 직업과 '용산 참사'라는 사건에 대한 작가의 시건이 드러난다. 대학원생인 내가 훗날 아마도 갖게 될지 모르는 '여성 강사', 늦은 나이에 편입하여 공부를 시작한 주인공의 사정 등 나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더 흥미롭게 읽혔다. 최근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용산 참사가 어떤 사건인지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는 점이 이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최은영의 소설은 언제나 현실을 담담히 관조하는 느낌이 있다. 부당한 착취나 차별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소설과는 거리가 멀다.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나는 그걸 읽고 조금 침울해진다. 그래서 나는 최은영의 소설을 남들만큼 높게 평가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 작품에서도 여성 강사인 선생님은 학생들의 맨스플레인에 '사이다'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잘못된 사실을 웃으며 지적해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고 단단한 태도를 일관하며 독자에게 깨달음을 준다. 그가 날카롭게 지적하고 사과를 요구한 것은 한 번 뿐이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며 남의 말을 끊어가며 의견을 함부로 재단한 남학생에게 그랬다. 또한 그는 '여성 강사'가 아닌 한 명의 선생의 입장에서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낸다. 뚜렷한 의견이 없는 글은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순응일 뿐이라고. 전에도 썼듯 이 소설에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속시원한 '사이다'가 없다. 주인공인 희원 역시 여성 강사가 되어 남성 정교수였다면 받지 않았을 대우를 받으며 힘겹게 살아간다. 나아가는 길 앞을 비춰주는 희미한 빛이 되주길 바랐던 선생님은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강력한 한 방 없이, 어떤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도 없이, 물흐르듯 담담하게 새로운 시각과 가르침을 주는 것이 최은영 소설의 장점이라고 이 작품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수상작과 작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먼저 문제의 김봉곤. 어떤 방식으로든 소수자의 목소리가 더 많이 가시화되어야 한다는 의견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퀴어 소재를 다룬다고 해서 작품성이 떨어져도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의 소설은 생각해볼 점이 아예 없는 텅 빈 작품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소수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나마 착즙할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 주인공이 소수자라는 점을 제외하면, 김봉곤의 <그런 생활>은 딱히 궁금하지 않은 남의 연애 치정극에 불과한 내용이 반 이상이었다. 아니 오히려 게이들의 연애이기 때문에 더 자극적이고 불쾌하게 다가온 부분도 있었다. 내가 주인공의 애인이 삭제했던 라인을 다시 깔아서 전 애인에게 플러팅하고, 이반시티에서 원나잇 상대를 구한 걸 왜 알아야 하나. 이건 성애를 떠나서 문란하고 자극적이고 가벼운 소재일 뿐이다. 꽃자니 학두니 하는 이름을 내가 소설책에서도 봐야하나 싶기도 하고. 퀴어 서사가 꼭 무결하고 아가페적인 사랑만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성매매, 외도, 원나잇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은 차고 넘친다. 퀴어라고 해서 쉬이 허용 가능한 부분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소설집의 존재는 알았지만 그 작가가 장류진이라는 건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수상작 <연수>를 다 읽고, 그의 다른 소설들이 아주 궁금해졌다. 나는 허세 없고 읽기 쉬운 문체를 참 좋아하는데 장류진의 문체가 딱 그랬다. 주인공이 느끼는 운전에 대한 공포가 너무 생생하고 구체적인 나머지, 면허를 따야겠다는 마음이 다시금 흔들리게 됐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운전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언젠가 꼭 장류진의 소설집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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