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울극복일기

우울증 극복 일기 6

by Haileee 2021. 3. 18.

오늘은 드물게 기분이 괜찮은 날이었다. 나는 여전히 한심하지만 기분만은 괜찮았다. 약효가 들고 있는 모양이다. 간신히 떼어내던 발걸음이 오늘은 가벼웠고, 목구멍까지 버겁게 넘기던 음식도 오늘은 잘 넘어갔다. 너무 잘 넘어가서 탈일 지경이다. 역시 이번주부터 먹기 시작한 아빌리파이정의 공이 큰 걸까? 이 약을 먹으면 식욕이 증진되고 살이 많이 찐다는 썰을 본 후 인터넷 커뮤니티 이곳저곳에 더 검색을 해봤는데, 역시나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2-30대 여성들이 차고 넘쳤다. 아픈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먹으면서도 외형의 변화까지 두려워해야 한다는 게 부조리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더 이상 살에 대한 걱정 때문에, 아직 찌지도 않은 살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기로 했다. 나를 이렇게 결심하게 만든 한 댓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의 유출 금지 규정 때문에 그대로 인용할 수는 없지만, "아빌리파이의 부작용=살찌는 것"이라고 일차원적으로 인식해선 안되며, 잃었던 식욕을 되찾았다는 건 곧 잃었던 기력과 의욕이 돌아오고 있는 신호라고 보면 된다는 게 요지였다. 즉 아빌리파이는 단지 살 찌는 약이 아니라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좋은 약이라고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 약을 장기간 복용하면서 진짜로 몸무게가 급증하게 되어도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지금은 불필요한 걱정들 중 하나라도 걷어내는 게 중요하니까. 그리고 입에 음식을 대는 것도 두려워하고 그로 인해 배가 고파서 기진맥진하는 나는 건강한 상태의 내가 아니다. 이건 확실하다. 다시 입맛이 돌고 있다는 건 원래의 나로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다. 남은 건 나를 망치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마구 먹지 않도록 나를 잘 다스리는 일뿐이다.

 

아무튼 오늘도 나는 하루종일 밥만 축냈지만, 면접 일정을 파토냈지만, 한심했지만, 기분만은 괜찮았다.

 

죽음에 대한 생각도 거의 하지 않았다. 내가 한심하고 못났다는 생각은 여전하지만 그로 인해 죽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신기했다.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하다. 좀더 괴로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쉽게 나아져도 되는 건가, 나의 과오를 속죄하려면 계속 괴로워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이렇게 괜찮아도 되는 건가. 내 주제에 괜찮아도 되는 건가...

 

하지만 언제 사라질 지 모를 이 괜찮은 기분을 좀더 이어나가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직전까지 사소하지만 새로운 일들도 조금 해봤다. 일단 유튜브로 명상을 했다. 뭐가 좋은진 모르겠는데 나쁘진 않았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는 건데 이게 개선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는 게,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나에게는 좀 위로가 된 것 같다. 내일은 아침 명상을 해보려고 한다. 내일 아침의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명상을 한 후에는 씻고 오랜만에 팩을 했다. 유자 향을 좋아해서 예전에 사두었던 유자 팩을 했는데 향도 좋고 촉촉해서 기분이 괜찮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위해 뭔가 했으니까, 살짝 칭찬해 줘도 괜찮겠지.

 

내일의 나는 또 죽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잠시나마 피어났던 희망이 또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어떻게 될까. 기분 상태와는 관계 없이 내일이 오는 게 무서운 건 여전하다. 부디 내일도 괜찮기를. 내가 괜찮을 자격이 있든 어떻든 간에, 하루종일 가슴이 쥐어짜이는 고통을 느끼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니까. 행복은 바라지도 않는다. 계속 괜찮고 싶다.

'우울극복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울증 극복 일기 8  (0) 2021.03.23
우울증 극복 일기 7  (0) 2021.03.22
우울증 극복 일기 5  (0) 2021.03.17
우울증 극복 일기 4  (0) 2021.03.11
우울증 극복 일기 3  (2) 2021.03.1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