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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극복일기

우울증 극복 일기 8

by Haileee 2021. 3. 23.

1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기록해 두어야겠다. 처음으로 엄마와 내 증상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스스로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병원에 함께 가려고 했었는데,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자 직접 부딪혀 볼 용기가 생겼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 같은 패배감, 자살 상상, 가끔씩 신체적으로 나타나던 불안 증세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논문을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고백과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해냈다. 새롭게 도전한 대학원 생활도 졸업으로 끝내지 못한 죄책감과 좌절감 때문에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결국 해낸 것이다.


엄마는 다행이라고 했다. 내게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 자체로 정말 다행이고, 지지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너무 미안하고 감사해서 엄마를 안은 채 펑펑 울었다. 엄마도 울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는 말도 드디어 할 수 있었다. 죄송스러움과 죄책감이 완전히 사그라든 건 아니지만, 가장 가까이서 나를 믿고 지지해주는 엄마의 존재를 지금껏 외면해 온 내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나를 사랑하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 이 나이 먹도록 사람 구실 못하고 있어도 내 곁을 떠나주지 않는 사람. 우울감에 빠져 지내면서 고마움이라는 소중한 감정 자체를 잊고 살아온 것 같다. 아직 아빠라는 사람 앞에서 내 생각과 주장을 펼치는 게 어려워서 항상 엄마를 매개로 소통해야 한다는 점, 아빠를 절대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점 등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아빠도 아빠의 방식대로 가족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그로 인해 누적되어 온 트라우마를 아직도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기에 나는 아직 그가 어렵다) 누가 됐든 가족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건 소중한 일이다. 더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난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몸을 좀 움직일 힘을 얻은 상태라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공부에 몰두하기 까지는 또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만큼 나아지기까지 걸린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만큼만 나를 아껴주고 다독여주자. 약도 열심히 먹고. 괜찮아지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믿으며.


엄마와 대화하고 나서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필사한 것.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나아가는 건 즐겁지만은 않지만 희망을 잃지 말자는 가사이다. 지극히 일본스럽지만 난 이런 감성이 좋다.

 

필사한 곡. 정말 정말 좋다.




2
역시 나는 남자라는 존재와 마주하기 어렵다. 상대하는 남자가 어떤 인간이든 불편하기 그지없다. 페미, 남혐, 뭐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건 지금껏 쌓여온 내 경험들과 관련된 문제이다. 내가 다니는 병원은 진료를 받는 사람들에 한해 무료로 명상 시간을 제공해 준다. 나도 저번주에 한번 받아봤고.. 결론적으론 이번주에도 하기로 했던 걸 취소했다. 솔직히 말하면, 명상 선생님이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문제가 아니다. 명상이 주는 이점을 알게 해 준 분이고, 차분하면서도 동시에 열정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능력 있는 분이다. 하지만 역시나 어렵고 불편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성별을 떠나 낯선 사람을 대하는 걸(사람에 국한되지 않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 자체에 두려움이 큰 편이다) 두려워 하는 증상도 문제지만, 어릴 때부터 겪었던 크고 작은 문제들이 남자를 어려워하는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나마 연령, 지위 등이 나와 동등한 동창생 정도라면 어느 정도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도 먼저 사사로운 감정 없이 편하게 다가와 준 사람에 한해서지만. 아무튼 그외 남성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존재이다.


어릴 땐 부부싸움을 하는 아빠의 모습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그의 모습은 징그러웠다. 이건 지금도 그렇다. 학창 시절, 불량한 남학생에게 주먹으로 배를 맞아본 적이 있다. 덩치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길거리에서 욕을 들어먹은 적이 있다.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면전에서 무시를 당해본 적이 있다. 캄캄한 밤 성추행을 당해본 적이 있다. 길이 좁아 비켜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침을 맞아본 적이 있다. 엄마에게 부당하게 화내는 아빠에게 대들었다가 큰 상처를 받을 정도로 욕을 듣고 사과를 받지 못했다. 뭐 이런 사소한 일들이 쌓이고 쌓여 남자라면 일단 경계하고 보는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어렵다. 남자가 너무 어렵다. 그냥 긴장을 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웃긴 건, 이렇게 남자를 불편해 하고 피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랑 받고 싶다는 마음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말 미치도록 부정하고 싶고 아무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불편한 감정만큼 큰 것은 아니지만 어렴풋이 느낄 때가 있다. 사랑 받고 싶다는 마음을. 이건 대체 어떤 심리일까? 정말 누가 해석이라도 해줬으면 한다.


그냥, 예약되어 있던 명상을 고민 끝에 취소하고 나니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고 그로 인한 지금 내 상태를 기록해 보고 싶었다.


언제쯤 모든 일을 과거와 연계하여 생각하는 버릇을 고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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