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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극복일기

우울증 극복 일기 9

by Haileee 2021.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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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정말 오랜만에 직접 건강한 식사를 차려 먹었다. 마트에서 산 저렴한 채소 믹스에 대저토마토, 대체육을 추가한 대단할 거 하나 없는 상차림이었지만 뭔갈 차렸다는 것만으로 뿌듯했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편도 아닌데 정말 맛있게, 감사하며 먹었다.


대체육은 ‘고기대신’이라는 브랜드에서 나온 베지가슴살(락토). 촉촉하고 맛있었다.


열심히 건강식을 차려 먹고 기록도 해보겠다며 사놓은 샐러드볼과 키친클로스를 몇 달이 지나고서야 처음 사용했다. 건강식이고 나발이고 사실 요즘은 야심차게 시작한 채식조차 멀리하고 있었다. 언제나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겠노라 의식은 하고 있으면서도, 양심상 덩어리 고기만 피할 뿐 우유가 함유된 디저트류, 과자류를 가족들 눈을 피해 침대에 앉아 꾸역꾸역 퍼먹었다. 채식을 시작하기 전의 나로 돌아간 것이다. 다시 나의 몸을 음식으로 학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주방 선반에 처박혀 있던 샐러드볼을 꺼내고 야채를 사오게 된 건, 병원을 다니면서 지금 내 선에서 차근차근 천천히 변화해 나갈 힘을 얻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 당장 한창 의욕적으로 건강 관리를 하던 때처럼 밥을 차려 먹고 강도 높은 운동을 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런 결심을 했다간 또 다시 결심한 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지금의 나는 하루나 이틀에 한 번 쯤은 저녁에 샐러드를 차려 먹을 수 있는 정도이다. 운동은 워밍업만 한다. 본운동도 시도해 봤는데 너무너무 힘들어서 바로 한 걸음 물러섰다. 조금 동적인 10분 짜리 워밍업만 해도 은근히 숨이 차고 땀도 흐르고 운동을 했다는 ‘느낌’ 정도는 든다. 예전의 나였으면 하루 운동을 워밍업으로 끝낸다고 하면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거라도 해내는 게 다행스럽다. 진심으로, 내가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게 다행스럽다.


2
마음의 안정을 위해 마음 챙김에 도움이 되는 책을 조금씩 읽고 있다. 관련 유튜브도 챙겨 본다. 예전에는 책을 읽을 때도 ‘지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며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책조차도 읽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잡념 자체를 흘려보내려고 하고 있다. 책이라도 읽는 게 어디야 라는 마음가짐으로 산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점점 나에게 너그러워지다 보면 내가 여태 해내지 못했던, 할 엄두도 못 냈던 것들도 점차 시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지금의 내겐 그런 믿음과 아주 조금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책은 다노 언니 제시로 잘 알려진 이지수 씨의 <마인드 스트레칭>이라는 책이다. 다이어트 코칭을 하는 사람이 썼지만 단순한 다이어트 방법론을 담은 책이 아니다. 제목에 나타나듯 마인드를 ‘스트레칭’하여 잔뜩 긴장된 마음을 이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짧은 내용 속에 지친 내 마음에 용기를 주는 명언들이 참 많아서 언젠가 리뷰도 한 번 써 보고 싶다. <마인드 스트레칭>을 다 읽은 후에는 최태성 선생님의 <역사의 쓸모>를 읽고 있다. 마음 챙김과 전혀 연관이 없는 장르로 보이지만 막상 책을 펼쳐 보면 그렇지 않다. 나도 이 책을 구입할 당시에는 단지 역사 교양을 쌓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는데, ‘역사’라는 학문을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위로를 얻고 있다.


위로가 되었던 부분은 따로 필사를 하고 있다.


필사한 것 중 큰따옴표 안의 내용은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쓴 편지의 일부라고 한다. 정약용이라는 인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것은 단지 한국사 시험을 보기 위해서 그의 업적을 암기했을 때뿐이다. 그의 가문이 폐족이 되고,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몇백 권의 책을 써서 후대에 남긴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은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에 침잠된 채 그저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는 방관자로 살았다면 정약용은 지금 역사책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학문 정진을 놓지 않고 자식들에게 가르침을 준 그의 인생에서 나 또한 많은 것을 배운다. 서른이 다 돼서야 ‘진짜’ 역사와 마주하게 되었다. 아직 반도 읽지 못했지만 앞으로의 내용도 기대된다.


아무튼 요즘의 나는 읽기 쉽고 위로가 되는 책을 하루에 몇 장씩이나마 읽고 있고, 하루에 한 끼나마 건강한 음식을 챙겨 먹는다. 꿈틀대는 수준으로라도 몸을 움직인다. 담배는 여전히 끊지 못했고 오히려 더 늘었지만. 여기서 빨리 더 나아가야지, 발전해야지 하며 조급해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럴수록 불안해진다는 걸 겪어보아서 안다. ‘나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빠져 절망한 채로 있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낫다. 많이 느리지만, 그래도 과거의 나보다는 낫다.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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