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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뚜벅이의 짧은 서울 근교 여행: 남양주 능내역, 다산 정약용 유적지

by Haileee 2021. 3. 27.
"저는 인생의 고비를 만날 때마다 정약용 남양주 생가로 가곤 합니다. 여유당 현판 아래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요. 역사 속 인물과 소통하면 지금 당장 닥친 문제를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되거든요. 역사라는 흐름 속에서 혀내를 보게 되니까요. 마찬가지로 내 인생 전체에서 이 문제는 수많은 고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고난이 인생의 끝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조급한 마음을 약간은 덜어낼 수 있어요."

최태성, 역사의 쓸모 中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역사의 쓸모>에서 가장 좋아하고, 위로를 받은 부분이다. 이 부분을 읽자마자 아, 나도 정약용 생가에 가봐야겠다 생각했다. 편도 2시간 정도 거리에 중간에 경기 버스를 한번 갈아타야 하는, 한번도 지나본 적 없는 경로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정말 좋아했던(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최태성 쌤을 '손민수'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여행의 목적은 관광명소 구경보다는 자연 만끽하며 힐링하기. 자연을 가까이 할수록 기분도 좋아진다고 하니까.

 

 

정약용 생가 이외에도 근처에 가 볼만 한 곳이 없을까 싶어서 검색을 해보다가 생가 근처의 능내역이라는 폐역이 하나의 관광 명소(?)라기엔 거창하고 레트로풍의 포토존이고, 바로 근처에 괜찮은 카페도 많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버스 안에서 세운 나의 계획은

 

능내역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카페에서 디저트와 커피로 끼니 떼우기(긴 버스 여행에 대비해 화장실을 갔어야 했는데 못 갔으니 카페 도착하자마자 화장실 달려가기) → 능내역 구경 좀 하다가 걸어서 정약용 생가까지 가기.

 

였는데...

 

 

능내역 폐역 바로 옆에 있는 카페 '바라보다'. 정식 재오픈은 4/1부터라고 함..

 

...코로나 때문에 임시 휴업이란다. 솔직히 이 카페만을 목적으로 능내역 근처에 내린건데 허망했다. 슬픔은 뒤로하고 이것보다 더 급한 화장실부터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렇다고 한다...

결국 계획에도 없었던 근처 아무 식당에 들어가 급히 주문을 한 후 화장실까지 해결했다. 그런데 의외로 여기서 먹은 막국수가 너무 맛있어서, 결론적으로는 기분이 좋아졌다는 거.

 

가게 이름은 아마 능내옥? 이었던 것 같다. 매콤고소한 비빔막국수.

 

 

 

사실 이런 레트로풍의 포토존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라서(여기서 내린 건 순전히 서울 근교의 넓고 예쁜 카페에 가고 싶어서였고 능내역 구경은 그 다음 일이었음..) 멀리서 몇 장만 찍어 보았다. 이 역 자체보단 앞에 펼쳐진 자전거 도로가 인상깊었다. 자전거 도로 옆에 보행로도 작게 끼고 있어서 이 길을 따라 산책하며 소화도 시키고, 정약용 생가까지 걸어갔다.

 

자전거 도로 옆을 장식한 개나리꽃과 괜히 한번 찍어본 내 발..

 

정약용 유적지까지 가는 길에 만난 강아지. 엄청 무서운 기세로 담 위로 올라오길래 깜짝 놀랐는데 막상 올라와서는 얌전하게 꼬리만 흔들었다. 너무 귀여워.. 사진 찍으려고 하면 절대 날 봐주지 않음.

 

유적지까지 가는 길엔 '마재성지'라는 곳이 있었다.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배경 지식 없이 갔다면 어리둥절한 채로 넘어갔을 뻔한 곳.

 

드디어 도착!

 

아직 만개한 정도는 아니지만 꽃이 정말 예쁘게 핀 정약용 유적지.

 

정약용 생가로 가는 길 양옆에 세워진 기둥에는

 

이렇게 정약용의 저서에 적힌 내용들이 새겨져 있다.

 

 

 

여유당 뒷편에 앉아 마스크 한겹 너머의 자연이라도 들이마셔 보려고 노력하며 코로 깊게 호흡도 해보고, 눈을 감고 생각에도 잠겨보았다. 유적지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 편하게 늘어져 있을 수는 없었지만 아늑하고 작은 여유당 안에서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일단 자연하고만 하나 되는 경험은 한 것 자체로 가치있었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가장 최근 여행했던 곳은 작년 가을의 속초였는데, 속초는 굳이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에 비해 정약용 생가는 오가는 길이 조금 복잡하더라도 날이 더 더워지기 전에 다시 한 번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적지 내 '언덕 카페'에서 먹은 커피와 케이크. 먹다 만 사진이지만 이게 제일 분위기 있길래...

다음에 왔을 때는 시그니처 메뉴라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고 싶다. 저 투썸 아이스박스를 닮은 케이크는.. 어설픈 맛의 아이스박스였다. 케이크를 남기는 법이 없는 내가 저 정도만 먹고 남겼다.

 

카페에 앉아서 일기를 쓰고, 커피를 마시고 잠시 앉아 있다가, 애초에 짧게 계획하고 오긴 했어도 이대로 집에 가기는 아쉬워서 다시 생가로 들어가 다산 정약용 묘지까지 올라갔다. 묘 사진을 찌는 건 뭔가 기분이 이상해져서(..) 주변 풍경만 찍어보았다.

 

귀가 코스는 생가 앞에서 56번 버스를 타서 경의중앙선 운길산역까지 가기(이하 생략). 운길산역까지 가는 이 버스의 배차 간격이 한 시간인데 나는 운 좋게 15분 정도만 기다려서 탈 수 있었다. 버스가 신기하고 예쁘게 생겨서 찍어보았다.

 

 

이렇게 오전 11시쯤 출발해서 오후 5시쯤 집에 도착한 뚜벅이의 남양주 여행(?). 여행이라고 하기엔 오고 가는 시간이 더 긴, 배보다 배꼽이 큰 수준의 이상한 계획이었지만 차 없이 걸어다녀야 하고, 혼자 왔다는 한계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일단 내가 만족했으면 되는 거니까. 지금 전국적으로 큰 비가 오고 있는데, 비가 오기 직전에 이렇게 다녀와서 참 다행이다.

 

 

날씨 좋은 평일에 간 정약용 유적지는 사람도 많이 없고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인터넷에서 본 강가의 풍경이나 생태공원은 즐기지 못했지만 생가에 간 것만으로 만족했다.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보단, 자연을 즐기면서 동시에 정약용의 가치관에 감명 받아 그가 살던 곳에 발 한 번 들여보려는 게 더 큰 목적이었으니까. 꽃이 더 많이 핀 4월에 한 번 더 와보고 싶다. 그땐 꼭 딸기 아이스크림도 먹어야지(기승전 먹는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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