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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성인 ADHD 치료를 시작하다

by Haileee 2022. 8. 3.

그저 우울증과 그에 동반한 무기력증을 앓고 있다고만 여기고 살던 내게 새로운 증상이 추가되었다. 바로 성인ADHD다.

작년 말 즈음부터 몇 개월 간 멋대로 단약했다가 3월 경에 감정기복이 평소보다 심해진 것을 계기로 다시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원래 다니던 병원은 버스 1번, 지하철 1번을 타고 가야했는데 이것이 병원에 쉽게 발을 끊게 만든 하나의 원인이 된 것 같아,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의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지독한 회피성이라, 마음대로 단약했던 주제에 다시 그 병원에 얼굴을 내밀기가 싫었던 게 가장 큰 원인이지만).

초진 날, 적어도 10년 이상 지속되어서 정상적인 일상 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날 망가뜨린 습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래에 얻게 될 더 큰 보상을 기다리지 못하고 즉각적인 쾌락만 추구하는 성향, 그러니까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하기 싫으면 그냥 안 하는 거다. 예를 들자면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수학 과목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기를 써서 하지 않았던 것. 수능 직전까지 과외 숙제를 회피하고 답을 베껴서 공부한 척을 했었다(들키지 않은 게 용하다). 그게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인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 나는 정말 오랜 기간 동안, 조금이라도 절제와 인내가 필요한 행위에는 집중하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또 미루다가 어떠한 성취도 이루지 못하고 살아왔다. 시도라도 했다 치면 15분도 집중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학습된 무기력이 지속되고 그것이 우울증으로 발전하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보상 지연을 참지 못하는 것과 동시에 충동 억제를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틈만 나면 흡연을 하고(전자담배를 산 이후로 집에서도 기회만 되면 피운다), 먹고 싶거나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 당장 먹거나 사야 한다. 그리고 많이 부끄럽지만 가장 심각한 증상이기 때문에 고백하자면 음란물 시청과 자위행위를 너무 자주 한다. adhd 환자들 중 충동적인 성관계를 자주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내 경우는 이것이 변형된 게 아닐까 싶다. 흡연은 백해무익하다는 것, 과식을 하면 나중에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 통장 잔고를 고려하지 않고 마구 결제하면 가난해지는 것, 음란물과 자위행위에 빠지면 기억력이 저하되고 소소한 행복에 둔감해진다는 것을 뻔히 알지만 즉시 주어지는 쾌락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이를 수치스러워 하면서도 멈추지 못하기에 자기비하로 이어지고 당연히 우울증은 심화된다. 초진 당시 의사 선생님이 adhd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딱히 충격적이지 않았다. 요즘 도파민 중독이라는 말이 거의 유행어처럼 쓰이는데, 나는 그런 농담 수준을 넘어선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충동성과 부족한 주의력 때문에 일상 생활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으니까. 간단한 성인adhd 자가진단 테스트를 통해 내 상태를 이야기해보자면,


1. 어떤 일의 어려운 부분은 끝내놓고, 그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해 곤란을 겪은 일이 있습니까?
가장 의아했던 질문. 어려운 부분을 어떻게 끝낼 수 있나요. 어떤 부분이든 간에 끝내는게 어려운데요.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는 건 그야말로 내 인생 한 줄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자주 그렇다'에 체크했다.

2. 체계가 필요한 일을 해야 할 때, 순서대로 진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까?
애초에 순서를 떠나서 진행 자체가 어려운 경우에는 어디에 체크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남이 체계를 정해준다면 기계처럼 따라할 수는 있을 것 같아서 '약간 혹은 가끔 그렇다'에 체크했다.

3. 약속이나 해야 할 일을 잊어버려 곤란을 겪은 일이 있습니까?
잊어버린다기보단 하기 싫어서 안하는 것이고, 약속을 까먹는 일은 자주는 아니고 아주 드물게 있기 때문에 '거의 그렇지 않다(드물게 그렇다)'에 체크했다.

4. 골치 아픈 일은 피하거나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까?
그냥 내 인생 그 자체. '매우 자주 그렇다'에 체크했다.

5. 오래 앉아있을 때, 손을 만지작거리거나 발을 꼼지락거리는 경우가 있습니까?
책상에 앞에 앉아서 뭔가 할 때 주로 발을 가만히 못 두는 편이다. 다리를 떨거나 맨발일 때는 (여기서부터 더러움 주의) 각질 뜯느라 일에 집중을 못한다. 뭔가 읽거나 쓰지 않고 손이 놀고 있을 땐 큐티클을 계속 뜯는다. '자주 그렇다'에 체크.

6. 마치 모터가 달린 것처럼 과도하게 혹은 멈출 수 없이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뭔가 너무 재미있는 일이라면 자주 그런다. "자주 그렇다"에 체크.

위 자가진단 테스트는 인터넷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병원에서는 위 항목 외에 10항목 정도가 더 추가된 테스트지를 받았었다. 음영 진 부분에 4항목 이상 체크했다면 증상이 의심되는 수준이라고 했고, 나는 5항목에 체크했다. 의사 선생님은 초진 때부터 바로 adhd 약을 처방해주진 않았지만, 몇 달 간의 상담과 테스트 끝에 나는 저번주부터 하루 한 번 콘서타를 복용 중이다.

adhd는 과잉행동/충동형, 부주의형, 복합형으로 나누어지는데 보통 성인adhd는 부주의형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나는 주의집중도 못하고 충동에도 약한 걸로 보아 복합형이 아닌가 싶다. 솔직히 절망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의 끝없는 우울과 무기력의 명확한 원인을 알게 되어 속이 시원하기도 하다.

한편으로 의문이 들기도 했다. adhd는 아동기에 발현된 증상이 성인이 된 후에도 지속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adhd 아동의 특성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얌전한 편에 속했다. ...라고 며칠 전까지 생각했었는데 들춰보고 싶지 않았던 과거를 좀더 깊게 파고들어보니 나는 그저 착하고 얌전하기만 한 아이가 아니었다. 너무 오래되어 잊고 살았을 뿐이었다. adhd 아동이라 하면 보통 주의산만하고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해 수업을 방해하는 남자아이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형태로 나타났던 것 같다. 조용히 사고치고 다녔다고 해야할까.

(지금부터 내가 나열할 특징들은, adhd라면 무조건 이런 성향을 보인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다만 병원에서의 상담 결과 충분히 adhd를 의심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은 부분이긴 하다.)

먼저,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의 점수가 심하게 차이나는 편이었다. 나는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이도 adhd 환자에게 흔히 보이는 특징이라고 한다. 전교1등을 차지하는 과목과 꼴찌를 겨우 면하는 과목이 공존했다(근데 이건 진짜 다 그렇게 살지 않나..? 솔직히 아직도 좀 의문이다).

좋아하는 일에 과하게 몰두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누가 제지하지 않으면 10시간도 넘게 쉬지 않고 인터넷 서핑을 했다. 사실 이것도 내 세대 초딩들은 다 이렇게 살았다고 믿으며 지내왔는데.. 10시간은 아무래도 심각한 수준이 맞겠지. 실제로 부모님이 크게 염려하기도 했었다.

손가락 가운데 부분을 쉴새없이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다.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한 것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20대 중반까지 양손 검지 가운데에 흉하게 굳은살이 배긴 채로 지냈다. 지금은 사라진 습관이지만 어릴 때부터 꽤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어려운 일을 끝까지 미루거나 하지 않는 습관은 청소년기 때부터 두드러졌다. 앞서 언급한 수학 숙제 이외에도, 학원에 가기 싫으면 집을 나서서 딴 데로 새는 경우가 허다했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학원 가서 공부하는 건 너무 어려우니까. 하기 싫으니까. 이런 생각이 언제나 최우선이었다. 독서실에 가도 해야 할 공부를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집중 시간이 매우 짧았다. 공부가 가장 중요한 고3 시절에도 공부보다 인터넷이 더 하고 싶을 땐 무조건 인터넷을 선택했다. 어쩌다 하는 일탈이 아니라 그냥 거의 대부분을 그렇게 했다.

마지막으로 이건 adhd보다 다른 요인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병원에서도 이야기하지 않은 거지만, 어릴 때부터 폭식이 잦았다(항상 뚱뚱했고 그래서 놀림받고 자존감 폭락은 덤이었다). 어릴 적 나는 공허하고 외로운 마음을 주로 음식으로 해결했다. 집에는 부모님이 잘 안 계시고 학교에서는 친구가 없던 시기부터였을 것이다. 사춘기에 돌입하면서부터는 사회가 정한 미적 기준에 부합하고자 아등바등 하다가 다이어트 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당연히 폭식을 불렀다. 먹고 싶다는 충동에 항상 져버리는 것은 adhd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심리적 공허함과 다이어트 강박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 같다.

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잊고 싶은 기억 투성이다. adhd를 떼어놓고 봐도 문제가 많았다. 서툰 대인관계, 외모 스트레스, 부모님의 잦은 다툼. 이 세 가지에 지배당해 내가 왜 공부에 집중을 못하는지, 특정 과목 공부에만 몰입하는지, 왜 해야 할 일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는지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곧잘 가만히 앉아있으니까, 내성적이고 조용하니까 의심조차 하지 않은 거겠지. 여자아이들이 조용한 adhd 증상을 보여도 간과당하는 이유이다.

그렇게 나는 충동적이면서(흡연, 과소비, 과식, 음란물 시청) 주의력도 부족한(집중 시간 최대 10~15분, 체계에 따라 제대로 일을 완성해본 적 거의 없음, 하기 싫으면 좆되든 말든 그냥 미룸) 어른이 되었다. 나는 왜 어디 하나 정상적으로 설계된 부분이 없나. 뇌도 마음도 망가진 채로 왜 그리도 오래 방치해 두었나. 내가 낭비한 시간들을 합하면 몇 년이 나올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데 요즘 우울증 약이 잘 드는지 웃기게도(다행히도?) 슬프다거나 죽고 싶다거나 하진 않다. 내 상황이 참 절망적이긴 한데... 그냥 글쿤... 순조롭게 좆돼있었군... 하고 마는 정도? 더 이상의 감정은 들지 않는다. 약 덕분도 있겠지만 나의 깊은 우울과 무기력이 내 탓이 아니란 걸 알게 되어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지 겨우 일주일이라 달라진 점은 크게 없다. 다행히 부작용도 없다(부작용 중에 식욕부진이 있다던데 밥만 잘 먹더라). 그래도 실행에 옮긴 것은 있다. SNS와 포르노 사이트를 차단했다. 아이폰은 스스로 설정한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차단을 쉽게 풀 수 있는 구조라 동생에게 비밀번호 설정을 부탁했다. 이걸 왜 이제야 했을까 싶다. 한동안은 금단 현상 때문에 괴롭겠지만 천천히 느리게라도 앞으로 나아가야지. 느리더라도, 실패하더라도 나라는 사람을 포기하지만 말고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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